황동규 시인의 신작 시집 『겨울밤 0시 5분』. 2006년 출간한 『꽃의 고요』 이후 3년 만이다. 지난해 등단 50주년을 맞이한 시인은 그동안 열세 권의 시집을 출간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지속해왔다. 그의 열네 번째 시집 『겨울밤 0시 5분』에는 총 63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시에 대한 열정과 관록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출처 : 교보문고
목차
제1부. 겨울밤 0시 5분
어느 초밤 화성시 궁평항 / 이런 고요 / 늦가을 저녁비 / 11월의 벼랑 / 삶을 살아낸다는 건 / 무(無)추억을 향하여 / 초겨울 아침 / 겨울밤 0시 5분 / 냉(冷)한 상처 / 허공에 한 덩이 태양 / 눈의 물 / 삶의 맛 / 낯선 외로움 / 깊고 길게 바라보았다 / 몸의 맛 / 축대 앞에서
제2부. 꿈이 사라지는 곳
다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갈 준비돼 있다 / 섬진강의 추억 / 누군가 눈을 감았다 뜬다 / 무릇 / 밤꽃 냄새 / 낙엽송 / 맨 가을 / 겨울 빗소리 / 잘 쓸어논 마당 / 겨울 산책 / 얼음꽃 / 하늘에 대한 몇 가지 질문 / 잠깐 동안 / 겨울의 아이콘 / 늦추위 / 속 기쁨 / 꿈이 사라지는 곳
제3부. 밝은 낙엽
안성 석남사 뒤뜰 / 사라지는 것들 / 오월동주(吳越同舟) / 장가계에서 / 잘 만들어진 풍경 / 구도나루 포구 / 태안 두웅 습지 / 밝은 낙엽 / 겨울 통영에서 / 젖은 손 / 대상포진 / 추억은 깨진 색유리 조각이니 / 저 흔하고 환한! / 삶에 한번 되게 빠져 /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편지
제4부. 무굴일기(無窟日記)
무굴일기(無窟日記) 1 / 무굴일기 2 / 무굴일기 3 / 박새의 노래 / 쓸쓸한 민화(民畵) / 빈센트 / 사당동패 / 한여름 밤의 끝 / 헛헛한 웃음 / 해바라기 / 가을날, 다행이다 / 외딴섬 / 시인의 가을 / 또 한번 낯선 얼굴 / 다시 한 번!
책속으로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이맘때가 정말 마음에 든다.
황혼도 저묾도 어스름도 아닌
발밑까지 캄캄, 그게 오기 직전,
바다 전부가 거대한 삼키는 호흡이 되고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원지로 가는 허연 시멘트 길이
검은 밀물에 창자처럼 여기저기 끊기고 있었다.
기다릴 게 따로 없으니
마음 놓고 무슨 색을 칠해도 좋을 하늘과 바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 냄새,
밤새 하나가 가까이서 끼룩댔다.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어느 초밤 화성시 궁평항」부분
이젠 휘젓고 다닐 손바람도 없고
성긴 꽃다발 덮어주는 안개꽃 같은 모발도 없지만
오랜만에 나온 산책길, 개나리 노랗게 울타리 이루고
어디선가 생강나무 음성이 들리는 듯
땅 위엔 제비꽃 솜나물꽃이 심심찮게 피어 있다.
좀 늦게 핀 매화 향기가 너무 좋아 그만
발을 헛디딘다.
신열 가신 자리에 확 지펴지는 공복감, 이 환한 살아있음!
-「삶의 맛」 부분
그의 시는 자연스럽다. 쏠림이나 과장이 없다. 다양한 경험과 ‘추억력’(‘기억에 상상력이 가미되어 더 간절해지는 회상’을 의미하는 황동규 시인의 사전에만 있는 언어!)을 근간으로 하는 시․공간적인 연장 혹은 연속의 논리 속에서 시의 서술은 유연하게 흐른다. 유연한 흐름 속에서 시인은 ‘깊고 길게 바라보는 법’(「깊고 길게 바라보았다」)을 즐겨 구현한다. 넓게 보여주는 롱숏과 오래 보여주는 롱테이크를 연상시키는 시의 시선은 우리 삶의 단면들을 자유롭게 펼쳐보이곤 한다. 실제로 그의 시에서 다채로운 문장부호들은 얼마나 자유자재로 사용되고 있는지! 그러나 그 자유로운 호흡은 절제된 시적 긴장을 기반으로 한다. 단어와 조사, 문장과 통사, 어조와 화법은 분방한 듯하나 한껏 절제와 균형을 견지하고 있으며 날카로운 통찰, 세련된 이미지, 섬세한 감정을 아우르고 있다.
- 정끝별, <해설> 중에서